요즘은 바빠서 선덕여왕 볼 시간도 없다.
근데 어쩌다 소지섭이 알천의 후예라는 신문 기사를 보고서 석연찮은 생각이 들었다.
알천은 상대등까지 지낸 진골 귀족인데 그럼 당연히 김씨여야 하는 거 아닌가? 김씨가 아니래도 박씨나 석씨여야 할 텐데.
소씨도 진골에 포함되나?
간단하게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니
소벌도리의 소씨는 후에 진주 소씨, 경주 정씨, 경주 최씨를 이룬다고 한다.
소씨나 정씨는 필자가 과문한 탓에 잘 모르겠지만, 경주 최씨는 분명히 6두품이 맞다.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모두 6두품이다.
그럼 결국 알천도 6두품이다.
진골이라는 게 결국 왕위 계승권에 근접해 있다는 뜻인데 박석김씨 외에 다른 성씨가 왕위 계승권을 갖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아찬까지 밖에 못 올라가는 6두품이 관등이 이찬에 이르고, 상대등을 역임했다는 건 어불성설.
거기다 진덕여왕 사후에는 섭정으로까지 거론됐다고?
결국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설을 세울 수밖에 없다.
1. 알천 당시에는 진골이었지만 후대에 6두품으로 강등됐다.
2. 알천은 소씨가 아니다.
3. 선덕, 진덕여왕 당시에는 골품제의 제한이 강하지 않았다.
1번이 왜 말이 안 되는지는 위에서 언급했다. 박석김 외의 성씨는 진골이 될 수 없다.
3번도 말이 안 된다. 골품제가 정립된 건 대체로 법흥왕 무렵이라고 보고 있다. 선덕, 진덕여왕 시대면 이미 골품제가 상당히 '빡세게' 돌아가고 있을 시기다.
결국 남은 건 2번?
근데 어쩌다 소지섭이 알천의 후예라는 신문 기사를 보고서 석연찮은 생각이 들었다.
알천은 상대등까지 지낸 진골 귀족인데 그럼 당연히 김씨여야 하는 거 아닌가? 김씨가 아니래도 박씨나 석씨여야 할 텐데.
소씨도 진골에 포함되나?
간단하게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니
소벌도리의 소씨는 후에 진주 소씨, 경주 정씨, 경주 최씨를 이룬다고 한다.
소씨나 정씨는 필자가 과문한 탓에 잘 모르겠지만, 경주 최씨는 분명히 6두품이 맞다.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모두 6두품이다.
그럼 결국 알천도 6두품이다.
진골이라는 게 결국 왕위 계승권에 근접해 있다는 뜻인데 박석김씨 외에 다른 성씨가 왕위 계승권을 갖는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아찬까지 밖에 못 올라가는 6두품이 관등이 이찬에 이르고, 상대등을 역임했다는 건 어불성설.
거기다 진덕여왕 사후에는 섭정으로까지 거론됐다고?
결국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설을 세울 수밖에 없다.
1. 알천 당시에는 진골이었지만 후대에 6두품으로 강등됐다.
2. 알천은 소씨가 아니다.
3. 선덕, 진덕여왕 당시에는 골품제의 제한이 강하지 않았다.
1번이 왜 말이 안 되는지는 위에서 언급했다. 박석김 외의 성씨는 진골이 될 수 없다.
3번도 말이 안 된다. 골품제가 정립된 건 대체로 법흥왕 무렵이라고 보고 있다. 선덕, 진덕여왕 시대면 이미 골품제가 상당히 '빡세게' 돌아가고 있을 시기다.
결국 남은 건 2번?



덧글
진골과 성골의 정확한 차이를 모르시네요...
성골 : 부와 모 양쪽이 왕족인 경우입니다.
진골 : 부 또는 모가 왕족인 경우 진골이죠...
알천.... 귀산... 등 신라 사량부(고허촌 최씨 소씨...) 출신들의 성은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모가 왕족인 경우 진골이됩니다.(신라 이전 사회는 모계성 이였을 확률이 높죠)
신라라는 사회를 너무 조선 이후의 가치관으로 평가하신듯....
또한 부의 성씨가 김씨였다면 굳이 역사서에 성씨가 기록안될 이유가 없죠..
하지만 어느 역사서에도 김씨라 기록된 역사서는 없죠...(이게 더 신기하지 않나요? 님의
추측이 맞다면 당연히 김씨인데 김씨라는 기록이 없다????)
진골과 성골의 차이에 대해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합니다. 제가 봤을 때는 진평왕 직계가 성골이라는 걸 새로 만들어서 스스로 뻐겼거나, 그보다 훨씬 후대인 신라 말엽에 진덕여왕까지를 성골, 그 이후를 진골이라고 인식했다는 게 훨씬 합리적입니다.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골품제 하에서 진골과 6두품의 결혼도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불가능하다고까지 단언할 수는 없으니 예외적 경우가 알천이라면 할 말이 없군요. 다만 그럴 경우에는 알천이 섭정으로까지 거론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 열전에서는 진골 이상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그 가계와 성씨가 김씨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골이 아닌 자들은 그 아비가 누구다 라거나,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등으로 기록하고 있죠. 알천의 경우에는 열전에 이름이 없으니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겠군요.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이 있지만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를 대조해보면 김씨임에도 삼국사기에는 성씨가 전혀 나오지 않은 인물들이 많습니다. 호림이나 양도가 대표적인 경우죠.
알천에 대한 기록은 진주소씨 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서와 일치된 내용도
있고 역사서에는 없지만 자세한 가계에 대한 정보...
알천의 배우자는 영아 부인 박씨 며느리는 이우부인 석씨...
그리고 알천의 동생들에 대한 기록도... 원광법사에게 세속오계를 받은 귀산이 동생으로 기
록되어 있습니다.
즉 혼인관계는 박석김과 혼인관계를 했으므로...왕족에 준하는 신분이죠...
그리고 귀산이나 알천이 사량부 출신인것은 사실입니다. 소벌공도 사량부(고허촌이죠)
태종무열왕 즉위이후 김씨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있었을겁니다.. 왕권강화랑 연관되어 있죠
진골 성골 개념도 마찬가지도.. 그 이전에는 화백회의에서 왕이 결정되지만 무열왕 이후에는
가계 세습으로 내려가죠...
또한 당대 신라의 한자는 뜻글자를 차용하는 이두식 표현으로 본다면 소씨는 철기 문명의
쇠에서 비롯된 성씨일 확률이 높습니다. 해씨가 태양숭배 사상에서 나왔듯이...
이기백 교수가 말한 金(쇠=금 : 김)에서 뜻을 차용하면 쇠가 됩니다.
지금의 서울도 소벌도리(소벌)을 쇠벌도리(쇠벌)에서 셔벌...서울로 변형된 언어입니다.
즉 한자가 초기에는 뜻을 차용하다가 차차 음을 차용하는 형태로 사용했다면 쇠=김은 통용
되는 언어가 되는 것이죠.
박씨, 석씨, 김씨가 아니더라도 진골귀족이 될수는 있겠네요. 더구나 그 조상 소벌도리는 신라의 개국공신이고... 이상할 것까지는 없어 보입니다.
소벌도리는 한번 소씨나 최씨들에게 물어보시는게 가장 빠른 길일듯...
또한 조상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 차체가 사실이 어느쪽이 가까운지 알수 있는
것 아닙니까?
김인문이 알천이 비문을 섰다는데 발견되어 가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면... 엄청
난 망신을 당할수 있는데.. 위변조는 상상할수 없죠...가문의 유사라는 것이 과장은 있을
수 있지만 제 3자를 조상으로 모신다는 것은 상상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연 설명하신 부분 중에 여쭤보고 싶은 부분이 또 생겼습니다. 귀산이 알천과 형제라고 하셨는데 부모가 모두 같은 형제입니까?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면 적어도 부는 같은 형제라고 생각 됩니다만.
그런데 삼국사기 열전 귀산전에서는 귀산의 아버지가 아간 무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6두품의 승진 한계가 아간, 즉 아찬입니다. 그리고 귀산이 전사할 당시에 장수로 출정한 무은의 직위는 급간, 급찬입니다. 즉, 무은이 몰하였을 당시의 벼슬이 아찬이라는 뜻이 되지요. 이건 전형적인 6두품입니다.
알천과 무은이 부자지간이 맞습니까? 소씨의 족보를 구할 수 있으면 쉽게 해결이 되련만 좀처럼 찾아지지가 않는군요.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초휘는 무은(휘는 휴곤)
5남을 두었고...
장남 알천 차남 태호 3남 귀산 4남 외사부 5남 문우라 되어있습니다. 부 휴곤의 모는 김씨
가 아니였을수 있죠... 후대 개념으로 그러면 6두품이 맞을 것이고 귀산은 젊은 나이
전사하였으므로 그 전사시 계급으로 판단하는 것은 오류...
무열왕 이후 품계를 나눠 6두품부터는 진급에 차등을 둔것은 신라 후기 왕족이 급속도로
늘어 나는 시점에 강화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물론 김씨 왕조의 왕권강화랑 일맥상통
하죠...(그 이전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거나 희박 했거나... 모계성씨를 중시했거나...)
저두 김인문의 묘비가 꼭 발견되어 정확한 진실이 규명되었으면 합니다. 진주 선학산을
모두 찾아 보고 싶네요..
http://cafe.daum.net/jinjusogo/F7bx/89?docid=tagg|F7bx|89|20070203200804&q=%BE%CB%C3%B5%20%C0%AF%BB%E7&srchid=CCBtagg|F7bx|89|20070203200804
명활산 고야촌 호진의 후손이며 '행세하는 집 자손' 설계두가 늦어도 선덕여왕 연간에 신라 골품제의 폐쇄성을 한하여 당나라로 건너간 사실에 미뤄 골품제의 강화가 무열왕 이후라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저희 집 족보도 안 믿는 사람인지라 남의 집안 가계를 부정한다고 노여워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도 알천공의 묘비가 꼭 발견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사라진 묘비석이 발견되지 않으면.. 족보기록을 정사에서는 인정하지 않을겁니다...
하지만 김씨 추정설은 중립으로 바꿔야할듯합니다. 네이버에서도 반영하여.. 김씨 추정은
삭제 했습니다.(김씨 추정설은 아무런 근거없는 추정입니다)
족보가 정확한것은 기록된곳에 가서 묘를 찾으면 있다는 겁니다. 이보다 정확한 것이 있
을까요??
최소한 생몰년 부모 형제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더이다.
묘가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묘가 누구의 묘인지 명확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겠죠. 알천의 묘라 전해지는 그 묘와 동시대 다른 무덤의 양식을 비교해 보면 좀 더 윤곽이 뚜렷해 질 듯 합니다만.
왕위계승권이 앞서서가 아닙니다. 당시 화백회의 의장이였기 때문에 추대된것이죠.
그런데 섭정이 뭐죠... 왕이 있지만 나이가 어린 경우 섭정을 하죠...그사람이 왕이 되는 것
이 아니라 일정기간 대리로 통치하는 개념이죠...
진주소씨 족보 기록이 삼국사기 보다 더 정확한것이 당시 시대상황과 맞아 떨어집니다.
나이는 김유신보다 18세가 많습니다. 김춘추보다는 27세가 많죠.. 즉 알천과 화백회의
귀족과 김유신 김춘추의 신진세력간의 권력 싸움에서 ..신흥세력의 대의명분이 더
강해 알천이 왕으로 즉위하기에 무리가 있었을겁니다.
김춘추 이후 당의 제도를 받아 들이면서 신라 왕위 세습이 가계를 중심으로 되어집니다.
또한 신라의 역사는 신권에서 왕권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태종무열왕(김춘추)시대부터
입니다.
알천이 모계의 진골 출신으로 당대에서는 대의명분이 김유신보다 약했고 신흥세력에
의해서 추출되는 과정이였을겁니다. 그러므로 김씨 추정설이 훨씬 근거가 희박하죠
에 나오지 않는 내용은 모두 검증 불가능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참으로 안타
깝네요...
설마하니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위해 남의 조상을 시조로 모시는것으로 추정하는것인지
이왕 남의 조상 시조로 삼을 것이라면...단군이나 치우천황을 모시것이 더 자랑스럽지않을
까요?
드라마로 인해서 알천이 알려졌지만, 수천년동안 알천을 알았던 존재가 과연 있나요? 역사
가들 마져 연구하지 않는 존재를 조상으로 모시고 내려온 사람들은 무엇일까요??
어느 시골의 김씨 집안에서 시조로 모신다면 김씨 추정근로 인정하겠습니다. 그도 아니면서
알천은 김씨라고 우기신다면........
화백회의 의장이라 섭정으로 거론됐다는 게 그래서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더군다나 계승자가 어려 섭정을 세운다면 누구를 신왕으로 옹립하고 알천을 섭정으로 추대한다는 말이 있어야 합니다.
김춘추 이후 가계 세습이 확립되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눌지 마립간 이후에 후사 없이 왕이 죽은 몇몇 경우와 폐위된 진지왕을 제외하고는 장자 승계가 철저히 이루어졌습니다.
골품제님께는 실례가 되는 말일지 모르나 소씨 족보는 적제 축융 복해공으로부터 시작하더군요. 단군이나 치우 못지 않은 시조를 이미 모시고 계십니다. 또한 많은 가문의 족보가 역사적으로 엄밀히 따져봤을 때 원시조와 중시조가 혈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한 것도 사실입니다.
각 가문의 족보는 분명 일정 부분 역사적 사실을 포함하고 있으며, 충분히 가치 있는 사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사로 분류하지 못하는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하군요.
처음 글을 올릴때는 나름 신라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은분인줄 알고 올렸는데 갈수록 실망
스럽군요.
화백회의가 뭐죠 각종 검색포털 초등학교 교과서를 봐도 나옵니다. 수 당나라 역사서에도
나오죠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만장일치제도.. 이게 깨진것은 고려에 항복할때를 제외
하고는 만장일치가 무너진적이 없죠.. 또한 무열왕(김춘추) 이후 화백제도는 약화되고 집
사부(왕권) 기능이 강화되죠..."여기까지 사실은 인정합니까??" 아님 잘 몰랐던 내용인가요?
왕권이 강화되면서 차츰 왕에 대한 우상화 작업도 당연히 진행되었겠죠. 그래서 알에서
태어났다는둥 동물들이 신격화 햇다는둥 ... 6부족장들이 모셨다는둥.. 여기서 사실상
초기 신라의 실권은 소벌공이 더 강했을수 있습니다. 강한 사람이 모신분이니 당연히 왕
권의 위엄은 더 강해 지는 것이죠. 저는 탄생신화는 신라건국 이후 왕권이 강화된 이후
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봅니다.
초기 신라는 연합체성격이 강한 국가죠.. 왕이라는 것이 중국과 현대적 개념의 왕이 아닙
니다. 박석김이 돌아가면서 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죠... 화백회의에서 왕을 선출한것
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물론 왕을 물러나게도 했죠.(초등학생용 만화에서도 나옵니다)
만장일치제도 대표적인것이 지금의 유엔이라는 국제 기구의 안보리가 만장일치제도 입
니다. 안보리 의장국의 권한이 막강하여 서로 할려고 싸우나요?? 상임 비상임 이사국이
돌아가면서 순번으로 하고 있죠. 중대사의 결정이 만장일치이기 때문에 의장의 권한은
약한겁니다.(아무런 실권이 없어요 사실상...)
무열왕(김춘추)이전의 신라의 상황은 지금의 유엔 안보리와 같은 상황이죠.. 부족연합체
적 성격이 강한 신라에서는 굳이 국왕이 중요한것이 아닌것이죠.
하지만 중국식 제도를 받아 들이면서 차츰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을 신라사회가 거쳐
갑니다.
하지만 신라가 멸망할때까지 화백회의는 유지됩니다.
이문제를 정사를 가지고 소씨임을 증명할수 없으므로 김씨이다라 주장하면 안되죠.
신라라는 사회가 소씨와 김씨만 살았던 사회는 아니지 않습니까??
김씨라 주장하는 쪽에서 결정적인 증거물을 제시해야 하는것 아닙니까?
처음 답글 쓰실 때는 말이 통하는 분인 줄 알았는데 갈수록 실망스럽군요. 슬슬 짜증이 나려고 하네요.
초등학교 교과서랑 어린이 만화 보지 마시구요, 삼국사기, 신구당서 구해서 보세요. 제가 위에 했던 말 거기 다 나와 있으니까요. 다시 한 번 정리해 드릴까요?
눌지 마립간 이후로 아들이 없는 경우와 진지왕 폐위된 뒤의 진평왕 제외하고는 모두 장자 세습이 적용됐구요, 화백회의에서 왕을 선출했다는 기록이 대체 어느 사서에 있는 지만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초등학교 교과서를 사서라고 하면 제가 어이가 가출할 것 같거든요.
박석김이 돌아가서 한 건 도대체 몇 세기 일을 말씀하시나요. 내물이사금 이후로 모조리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고 있어요. 신구당서에서 '왕족은 김씨고, 귀인은 박씨다' 써놓은 건 못 보셨죠?
그럼 신당서에서 '왕족은 제1골이고 아내도 그 족이며 ... 제2골의 딸은 취하지 않는다'라는 건 당연히 못 보셨겠네요? 그럼 6두품 무은 아들 진골 알천이 대체 뭔 소린지 이해를 못 하시겠네요.
결국 신라는 7세기까지 부족 연합체였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건가요? 그 부족 연합체가 연맹국가 가야를 멸망시키고, 고대국가 고구려, 백제와 한강유역을 다퉜다 이 말이죠? 초등학교 교과서 다시 보고 오세요.
일단 사과의 말씀을 드리죠.
알천과 소씨의 관계에 대한 입장이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김과 소가 혼용되었던 기록이 있고 하니 지금의 소씨가 알천의 후예일 가능성은 배제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알천은 당대에는 김씨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알천의 후예들이 소씨로 성을 고쳤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보입니다. 즉, 진주 소씨가 경주 김씨에서 갈린 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윗대의 조상이 되는 소벌도리와의 관계가 문제가 되겠죠. 일전에 언급했던 원시조와 중시조가 혈연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의 하나라고 보입니다만, 거기까지 파헤치고 싶은 생각은 없군요.
지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는 사실은 알천은 신라 왕실의 일원이었으며, 소벌도리의 후손일 가능성은 낮으며, 무은의 아들일 가능성도 낮다는 겁니다.
덧붙여 말씀 드리자면, 어디 가서 7세기까지 신라는 왕위가 중요하지 않은 부족 연합 사회였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어차피 서로의 입장이 평행선인데다, 더 이상 토론을 진행해봐야 했던 말이나 계속 반복할 것 같군요. 골품제와 신라 왕권에 관한 글은 나중에 따로 한 번 포스팅 하도록 하겠습니다.
당대의 사회상을 기본적으로 이해하는데 님의 지식이 부족 하다는 소리입니다.
님 처럼 사서의 기록만 진실이다. 가계의 기록은 족보의 기록은 모두 위서다라고 가정한
다면...빈약한 사서로 당대의 사회상을 알수 없죠.(이것도 인정 안하죠). 이건 당연한것 아
닌가요.. 그리고 님은 권력의 속성도 모르시는 분 같네요.
제가 한가지 숙제를 내죠...님이 알고 있는 사량부 출신중 성씨와 본관이 있는분 좀 열거
해줄수 있나요?
족보등 사문서를 제외한 역사서를 바탕으로 사량부 출신중 성씨와 이름이 모두 있는 사람
을 꼭 찾아서 열거해 주세요
님의 주장대로라면 모두 최씨로 생각할수도 있겠구...아님 소씨, 정씨?
그런데 사량부 출신 인물들 거의 모두가 성씨 및 가계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 백미
는 알천이죠.당대에 상대등까지 오른 분에 대해 가계를 기록하지 않는다.(오히려 가계에
대한 기록이 없는것을 의심해야 하는것이 상식입니다. 가계에 대한 기록이 없고, 섭정왕에
오른 사람이기 때문에 김씨다 라고 주장할것이 아니구요)
어떠한 의도로 성씨 및 가계에 대해서 누락 시켰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역사서를 보면서 보편적인 시각으로 사실에 접근을 해야 하죠. 역사서를 달달외운다고
유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록과 기록 이면의 사회상을 알수 있는 것은 풍부한 가능성을
열어 놓고 여러종류의 사적기록물까지 검토가 이루어져야 역사적 진실성을 알수 있죠.
가령 과학이 너무발달해서..
사람은 알에서 태어날수 없으므로 혁거세 신화는 위서다. 그러므로 신라의 건국 자체가
한민족 역사의 유구성을 자랑하기 위해 거짓이다. 주장하면 이게 과학적이고 사실에 부
합할까요?
위와 같이 주장한다면 과학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에 가깝게 이야기 한것이죠 하지만
왕권에 대한 우상화 작업과 신라건국이라는 실체적 진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보여
주는 겁니다.
우상화 및 신격화 작업을 위해 거짓된 내용들을 담았지만 국가의 건설과 통치에 대한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김씨발음 문제는 님은 중국인인가요?
최소 한반도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중국과 다른 민족이죠.. 이것도 인정 못하시나요?
언어도 다르죠... 소리는 있지만 문자는 없었죠.
"쇠유리" 이걸 발음해 보죠.. 또는 처용가에 있는 "셔벌" 발음해 보죠...
그리고 소리는 있지만 문자는 없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다 한자가 들어 왔어요... 이럴 어찌 적용할까요? 뜻으로 적용할까요 음으로 적용할
까요.
음으로 적용한 경우가 蘇되겠죠... 발음이 제일 비슷.... 뜻으로 적용하면 金가됩니다.
현재 우리가 발음하는 김씨는 당대에 발음상은 저는 없었다 추정합니다. 후대에 김이라
읽죠... 중국식 문자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조선시대와서나 가능합니다.
단 현재의 김씨와 제일 유사한 발음은 진입니다. 음을 적용하면 眞 가야계 왕족 성씨가
사기의 기록에는 진(眞)이라 나오죠... 중국어 金 발음이 진에 가깝습니다.
웃기죠 1500년전 우리 조상의 발음도 모르고 있으니...
자기 가계 하나 증명하자고 7세기 신라를 부족연합체로 만들어 놓은 분께서 당대의 사회상 운운하는 것도 우습구요. 당대의 사회상은 위에서 열거했던 교차 검증을 거친 1차 사료들에 적확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사회상과 충돌이 생기는 부분이 그 족보라는 거구요.
그냥 하시는 김에 소벌도리 넘어 적제 축융까지 열심히 증명해 보세요.
위에서도 밝혔듯 이제 토론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이 말싸움을 더 진행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곳곳에서 드러나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일일이 지적하고 싶은 의욕도 사라졌구요. 이후로 달리는 댓글은 모두 '반사'하도록 하죠, 적제 축융의 후손님 ^^
ㅋㅋㅋ 1차 사료....
당신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고... 곧은나무처럼 골품제가 엄격해 상대등까지 오른 인간은
100% 김씨인데... 2000년대를 사는 분의 상식인걸....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아둔하
여 몰랐다면 그 삼국사기의 진실성은 어느정도요...
그러면 아둔한자가 편찬한 삼국사기를 진리인양 믿고 있는 당신은 또 뭐여 당신 보다 못하
게 신라 사회상을 이해하고 있는 김부식의 글을 믿는단 말이요??
곧은나무도 알고 있는 알천은 김씨인걸 왜 김부식은 몰랐을까?
참 똑똑하여 좋겠죠...
ㅋㅋㅋ 좋겠소 이기백 교수와 김부식을 능가하는 한민족 역사 3000년 가장 위대한 곧은
나무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가로 당신을 임명하오...
다시한번 말하오... 어느 가문이든 자기 조상의 위대성을 과장할지언정 남의 조상을 섬기
는 우를 범하진 않소...이정도 상식이 없다면 빨리 병원에 가보길 권하오...
김부식과 이기백 보다 신라의 사회상을 더잘 이해하고 있는 곧은나무님께....
마지막으로 숙제 하나 더 내 드리죠..
우리가 말하는 성(姓)과 씨(氏)의 차이를 말해 보시요... 혹시 구분은 할줄 아시요??
갈수록 밑바닥이 들어 나요??
네이버 검색해 보니,
'진주 소씨 :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의 하백에 봉해지고 기원전2266년 소성이 단군조선에 영속 되었으며 기씨를 소씨로 고쳐서 소씨가 생겼다고 한다. 소곤오(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이렇게 나오는데요?-_-;; 골품제 님께서 金자 들어가며 설명하시는 부분에서는 저도 그럴듯하다 수긍했으나 이 정보는 뭐라 설명해야할까요?
소벌도리가 서울이 되었다 하셨는데; 보아하니 여기 소벌도리는 사람 이름인 듯 한데 ... 음.
http://ko.wikipedia.org/wiki/%EC%86%8C%EB%B2%8C%EB%8F%84%EB%A6%AC
더 찾다가 위키백과를 참조해 보았습니다.
소벌도리 공은 삼한시데 진한의 왕족으로 사로국의 6부 촌장이셨고
박혁거세를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시니
소씨인 알천이 귀족이고, 상대등에 오른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아보입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86%8C%EA%B2%BD_(%EC%82%AC%EB%9E%8C)
이거 보시면 알천이 진골, 성골만 가능한 이찬 벼슬도 하였고 하니
소씨도 진골 또는 성골이 맞는거 아닐까요~
암만 선덕여왕의 뒷빽이 있었다고 했어도 출신 성분이 되어야 가능했겠죠
(사실 알천 아버지인 무은이 6두품이 하는 벼슬까지밖에 못올라간 것은 설명 못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냥 능력탓이었을지도;)
제 생각에는 두 분의 의견이 출동하게 된 것이 화백회의의 권한에 대한 이야기부터인데.
음-_-... 제 짧은 식견으로는 알천의 조상인 소벌도리가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면....
소씨는 일단 박씨로 시작하는 신라 왕조의 초기의 실세?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박,석 김 3성에서 김씨 세습으로 왕위계승이 바뀌게 되면서
박씨 관련 실세였던 일족들은 일단 신분은 귀족이되 권력궤도에서 멀어진 구귀족으로 자리잡게 되는 거 아닐까요?
위에 위키백과에 알천이 김춘추한테 왕위를 양도하고 어쩌구 저쩌구 나오는데서
이것이 구귀족이 신흥세력에게 권력을 양도하는 상징이 된다고 하더군요.
이게 그 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모두 신라의 시조는 박씨라고 배우는 만큼(김알지, 석탈해 신화보단 유명하기도 하구요), 그 시조 성씨 추종파의 위세가 그리 쉽게 끊어지진 않았을 듯 해요.
전 전공자가 아니라서 일단 추측을 ㅋㅋ
나중에 무열왕이 자기한테 왕위를 넘겨준 알천에게 보은의 뜻으로 문열왕에 봉해주기도 하는 사실로 보아, 밑도끝도 없이 6두품 출신에게 그런 대우를 하지는 않았을 것도 같구요.
즉 제 의견은, 아무리 김씨가 실세로 득세하게 되어도 이전 세력들이 싸그리 귀족 족보에서 사라지진 않았을 거라는 겁니다. 정권이 교체되면 일단 요직에는 여당 인사들이 들어차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관직자가 다 여당인사가 아닌것처럼 말입니다. ㅋㅋㅋ 비유가 좀 별론가요?
잘못된 사실인 듯 합니다.
'서울'은 신라의 '서라벌(경주)'에서 유래합니다.
서라벌이란 말은 '새 벌' 즉 '새로운 평야'라는 뜻이랩니다.
새벌을 음차한것이 徐伐(서벌)->서울이 된거죠.
ㅂ이 '우'음이 된 것은 순경음 ㅂ이 후대에는 오/우로 바뀌었다고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84%9C%EC%9A%B8%ED%8A%B9%EB%B3%84%EC%8B%9C#.27.EC.84.9C.EC.9A.B8.27.EC.9D.B4.EB.9D.BC.EB.8A.94_.EB.AA.85.EC.B9.AD.EC.9D.98_.EC.9C.A0.EB.9E.98
쇠벌 이 어원이라는 설도 있기는 하나 어휘의 변천을 고려할 때 새로운 벌 이라는 쪽이 더 지지를 받는 듯 합니다.
음.... 그럼 김씨 추정도 그닥 근거가 없지 않을까요_-_.....
성골에서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화백회의의 추대에 따라 의장인 상대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상례인 것에 따라, 알천이 왕위서열권에서 김춘추보다 앞섰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허허. 화백회의 쎄네요. 저도 방금 찾아보고 알았습니다 -_-;;
서울의 어원까지도 정확히 모르는 것이 오늘날 우리 처지입니다.
우리 조상의 소리는 있지만 글이 없었던 관계로 문자 표기를 한자를 가져다
했으나 그 일관성이 없고.. 정확한 음을 가져다 쓸수도 없으나 얼마나 힘들었
겠습니다.
세종의 말대로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얼마나 많은 불편함이 있었겠습니까?
제가 쇠(쇄 여기서 ㅚ ㅙ 에서 정확한 음은 아래아 .)발음 문제로 추론한글입
니다. 아직 까지 서울의 정확한 어원이 없습니다. 다수설만 있죠... 제 추측이니
진리라 말은 못하죠... 틀렸을 가능성이 더 많고...
금성(金城) 경주... 서라벌은 뜻과 음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표기 방법이였죠. 당대인들의 정확한 소리가 저는 쇠벌이였지 않나 하는 소리
입니다. 금성도 기실 우리말로 하면 쇠울이되죠... 뜻으로 보면 쇠금자에 재성자는
울타리 개념이 있으니.. 여기서 쇠의 발음은 오 발음과 어발음의 중간정도 됩니다.
공교롭게 우리가 오늘날 서라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금성의 쇠금과 쇠
라는 철기문화는 어울립니다. 또한 벌이라는 말은 넓은 평원을 말하는 순우리
말이죠 모레벌판 벌....등등등
이게 공교롭게 신라 건국신화에 나오는 소벌공과 음이 같은 점에서 착안한
추측입니다. 제가 소를 철기문화를 가진 시베리아인들의 쇠로 추정하는것과
같죠.
정말 공교롭게 신라 왕경 사량부는 바로 돌산고허촌 소벌공의 부족입니다.
그래서 추정하는것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추정이므로 보다 역사를 심도있게
공부한분들이 증명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보여 지네요..
사실을 배운 것이 스쳐가네요. 음. 재미있는 이야기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고대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때 사람들이 한자를 어떻게 발음했는지 정확하게 알진 못합니다. 우리는 지금 '徐伐'을 '서벌'이라고 읽지만 그당시에는 '셔벌'또는 '쇠벌'이라고 읽었을지도 모릅니다. 발음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니까요.
그렇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 때 사람들이 한자를 빌려 고유명사를 표기하면서 '徐伐'이나 '金城' 처럼 음이나 뜻을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지만 읽을때는 둘 다 '서벌'이라고 읽었다는 거지요. 발음이 같았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점차 '金城' 도 '금성'처럼 한자음으로 읽은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을 것입니다.
↑ 요건 지금 동생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설명을 옆에 두고
서벌이랑 금성만 대입해서 적어봤는데ㅋㅋㅋ 이렇게 보면 골품제님의 설명도 십분 설명이 되는 것 같습니다.
백제와 신라의 언어가 남방계 원시 한어로 비슷했고, 나중에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말이 중앙어가 되고, 그것이 고려, 조선으로 이어져 왔다는 것을 볼 때 상당히 흥미있는 의견입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84%9C%EB%9D%BC%EB%B2%8C
신라 왕경 사량부는 바로 돌산고허촌 소벌공의 부족이라는 사실은
이 위키백과를 보니 더 확실해 지는군요.
'소벌공은 곧 고허촌장이라는 뜻인데, 마치 사람의 이름같이 씀은 역사가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 라는 대목을 보면 소벌도리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지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헌데 이 설명으로 보면 '서라벌'이 '새라벌'로 불렸고, '새라'는 냇물 이름이며, '새라'의 위에 있는 '벌'이 '서라벌(徐羅伐)'이라고 하니....
'金城'에서 쇠벌이 유래했다는 점은 민간어원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경주를 지칭하는 이름이 금성이랑 서라벌 두개이고, 어원이 각기 다른 것인가요? ......... 갑자기 혼란이;;
어찌하였건 그래서 서울의 어원이 '쇠 벌'이 아니라 '새로운 벌'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는 조금 더 대세인 것 같구요. 딴소리긴 하지만 일단 서울땅을 먼저 차지한 것이 백제일테니 백제쪽의 어원 기록을 살펴보는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백제말쪽은 사료가 적어서 안타깝습니다. 고대 국어의 표기법이나 발음법도 향찰, 이두만 전해지고 백제도 대충 비슷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이루어지는 오늘날이기도 하구요.
그치만 금성과 쇠벌의 음독, 훈독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고도 신기하군요^^
"1979년의 일인데, 진주 소씨 서울 종친회의 한 분이 종친회보를 가지고 연구실로 필자를 찾아왔었다. 그러면서 진주 소씨의 시조는 신라시대 상대등이던 알천인데, 회보에 알천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알천은 김씨이므로 소씨일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다른 구실을 들어 거절하여 보냈다. (중략) 그 뒤에 필자는 신라 말기에 김해 지방에서 활약하던 김율회가 때로는 소율회라고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김(金)과 소(蘇)는 서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金은 음이 '김','금'이지만 그 뜻은 '쇠'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알천의 성이 소인 것이 잘못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알천이 신라 왕족이라는 것은 여전히 의심하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