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의용대의 창립
1938년 조선민족전선연맹 이사 김원봉은 중국 국민당 총재 장개석에게 조선의용대 건립 방안을 제출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국내독립운동 조직 결성, 조선혁명을 담당할 무장대오의 건립, 조선 국내외 각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활동 목표로 삼은 조직이었고, 김원봉은 의열단과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끈 약산 김원봉,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장개석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조선의용대의 조직 작업에 착수했는데, 그의 목적은 조선인 청년들을 조직하여 중일전쟁에 참전시키는 데 있었다. 당시의 전황을 살펴보면 일본군에 의해 남경이 함락되고 다시 무한까지 위기에 처한 위급한 상황이었다.
초기의 조선의용대 조직 방안은 지도위원과 비서장 등 고위 간부를 전원 중국인으로 채우려 했는데, 김원봉 등 조선인들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초기 조선의용대 인원은 약 100명 가량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의열단 간부 양성기관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 등 김원봉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 최창익 등은 조선인이 적은 관내보다는 동북(만주)지역에서의 활동을 주장하며 민족혁명당을 탈당했다가 다시 조선의용대 건립에 가담하여 제2구대를 구성했다.
2. 조선의용대의 활동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의 필요에 따라 호남, 낙양 등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이는 중국 국민정부에 직속되어 독자적 활동이 불가능했던 조선의용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조선의용대 본부는 중일전쟁의 경과에 따라 호북 무한에서 광동 계림, 사천 중경으로 이동해야 했다. 조선의용대는 포로 심문, 선전공작, 정보수집, 중국군에 대한 일본어 교육 등의 임무를 주로 맡았고 활동 중 조직 규모가 커짐에 따라 2개 구대에서 3개 지대로 개편되었다.
3.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1941년 조선의용대의 일부 병력이 낙양을 거쳐 연안으로 북상한다. 국민당군의 소극적 항일전략, 최창익의 동북노선에 대한 재조명, 보수파 김구와 김원봉의 결합에 대한 반대, 중국 공산당의 조선인 외곽단체 조직 지시 등이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활동은 국민정부군 휘하에서의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무장선전공작으로 일본군 점령지역 내 중국인,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선전전, 일본군을 대상으로 한 반전 선전전, 조선인 학병 초모공작 등이었다. 그 과정에서
호가장 전투가 벌어졌고, 이듬해에는 일본군의 소탕전에서 팔로군 지도부의 혈로를 뚫는 활약을 보였지만 윤세주, 진광화 등이 전사했다.
소탕전 이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되었고 대원들은 모두 조선독립동맹에 소속되었다. 조선독립동맹 예하의 군사조직이 된 것인데, 조선독립동맹에 소속된 조선인들 대부분이 조선의용군에 속하기도 했다. 이 시기까지도 중경의 조선의용대 본부와는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나, 1942년 7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면서 독립동맹에서 떨어져 나와 팔로군의 지휘하에 들어가면서 두 조직의 연결은 완전히 끊어지게 되었다. 그 해 12월, 조선의용대 본부는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군이 팔로군에 예속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조선의용대원으로 호가장에서 포로가 됐던 김학철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대원은 극히 소수였으며, 왕통이 1941년에 쓴 '조선의용대의 정치노선'이라는 글에서 조선의용대 또한 계급의 군대가 아닌 민족의 군대를 자처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을 조선독립동맹에서 분리하려는 논의가 제기되었을 때 최창익은 여기에 반대하며 조선의용군의 독자성을 주장했지만, 무정은 이것을 '협애한 민족주의'로 비판했다. 결국 무정과 중국 공산당의 의도대로 조선의용군은 팔로군 예하부대로 처지가 바뀌게 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임시정부의와 광복군의 관계도 차츰 바뀌게 된다.이 이전까지 조선독립동맹은 스스로를 지방단체라 자처하며 임시정부를 중앙으로 봉대하였으나 1943년 이후로는 임시정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화되어 "진정으로 혁명하는 곳이 아니다"라거나,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수많은 독립운동단체의 하나로만 인식하게 되었다.
4. 조선의용군의 활동
조선의용군은 산동에서 연안까지 화북지역 곳곳에서 팔로군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며 중국 동북지역에 있는 혁명세력, 조선 국내 민족운동세력과도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특히 북만주 지역에는 이상조를 파견하여 조선독립동맹 지부를 결성했다.
적 점령지 깊숙히 들어가 활동하는 적구공작도 활발하게 전개됐다. 당시 일본군은 군량 확보를 위해 화북지역 곳곳에 집단농장을 세우고, 중국인 뿐만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들을 투입했는데 조선인이 많은 곳은 4천명이 넘기도 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인과 조선인 노동자들을 설득하여 정보를 제공받거나, 조선의용군으로 가입시켰다. 이와 같은 활동을 통해 해방 당시 조선의용군은 천여명에 가까운 숫자로 늘어났으며 정규군으로 재편되는 움직임을 보였다.
1945년 8월 11일 주덕은 조선의용군에게 팔로군과 함께 동북으로 출병하여 적을 소멸하고 동북이 조선인민을 조직하여, 조선해방을 완수할 것을 지시했다. 한편, 일제의 항복과 함께 심양에서는 비밀공작을 전개하던 한청에 의해 조선의용군 1개 부대가 편성되었으며 이들은 관내에서 파견된 조선의용군과 함께 신의주에 진입했으나 소련군의 거부로 심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이들은 조선인을 조직하여 새로운 조선을 건설할 역량을 확보하고 토비들로부터 조선인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동북조선의용군을 조직했는데, 여기에 가입하려는 조선인들이 몹시 많았다. 국민당보다 열세인 병력을 만회하기 위한 중국 공산당의 한인 부대 창설 노력도 더해져 조선의용군 1지대의 경우만 해도 1만 2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후 국공내전,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