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교과서상의 서술
1) 금성출판사
…(전략) 1918년에 토지 조사 사업이 끝났을 때 사실상 농민의 소유였던 많은 농토와 공공 기관에 속해 있던 토지, 마을 또는 집안의 공유지로 명의상의 주인을 내세우기 어려운 동중․문중 토지의 상당 부분이 조선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분쟁이 일어났지만, 그 해결은 일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렇게 빼앗은 토지를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비롯한 식민회사나 일본인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겼다.
토지조사사업으로 농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종래 농민은 토지의 소유권과 함께 경작권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는 지주의 소유권을 옹호하면서도 관습상의 경작권이나 영구 임대 소작권과 같은 본래 소작 농민의 권리는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또, 종래 허용되었던 농민들의 입회권도 빼앗아버려 토지에 대한 농민들의 권리는 종전에 비해 크게 약화되었다.
2) 대한교과서
1910년대에 일제가 식민지 경제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가장 서두른 일은 토지의 조사 사업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모든 토지의 소유권을 다시 조사한다는 구실로 토지를 약탈한 것이다. 그 과정과 결과를 알아보자.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으려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고, 신고 기간도 매우 짧았다. 그리하여 기한 내에 신고를 못한 사람이 많았고, 마을이나 문중의 공유지도 신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일제는 이러한 토지와 공공기관에 속해 있던 토지를 모두 약탈하여 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총독부는 이 땅의 일부를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 토지 회사나 일본인 지주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겼다. 그 결과 일본인 농업 이민이 10배로 크게 늘어났다. 한편, 토지 소유권과 토지 가격 조사로 인해 총독부의 지세 수입도 1919년에는 1911년의 두 배로 늘어났다.
2. 수탈론적 관점
1) 토지조사사업의 목적
(1) 일본 자본의 토지 점유에 적합한 토지소유 증명제도 확립
- 대한제국 시기에도 토지 소유권이 확립되어 있었으나, 토지에는 사유권 외에도 농민층의 각종 권리가 부착되어 있어 일본 자본의 토지 점유에 장애 요소로 작용했음
(2) 지세수입 증대
(3) 국유지 창출
- 역토(驛土), 둔토(屯土) 등의 관전(官田)과 궁방전을 무상으로 점유하기 위함
(4) 미간지(未墾地)의 무상점유
(5) 토지조사사업 이전에 이뤄진 일본인의 토지 점유 합법화
- 을사늑약 이후 일본인의 토지, 가옥의 매매와 소유를 합법화했으나 임시적 조처였으므로, 완전한 합법화 시도
(6) 일본인 이민자에게 한국 토지 불하
(7) 일본 본토에 수출하는 미곡량의 증가시킬 수 있는 제도 정비
- 지주 체제의 재확립을 통해 일본으로의 식량수출증대가 가능해짐
(8) 일본 산업자본의 노동력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의 소작농을 임금 노동자화하는 제도적 기초 마련
- 소작농을 토지소유 및 경작권으로부터 완전히 분리, 일본 산업자본에서 필요시 임금노동자로 전환할 수 있는 구조 조성
2) 토지조사사업의 실상
(1) 역둔토의 국유화
- 역둔토(驛屯土) : 역토와 둔토를 일컫던 말이었으나, 통감부가 주도한 국유지 정리사업 이후 궁방전 등을 포함한 모든 국유지를 지칭하는 말로 바뀜
역둔토의 종류 | 구분 |
유토(有土) 역둔토 1종 | 관청 소유 토지에 조세를 면제하고, 해당 궁방 혹은 아문(衙門)에서 소작인으로부터 수확의 반을 수취 |
유토(有土) 역둔토 2종 | 민유지에서 국가에 납부해야 할 세금을 궁방 혹은 아문에 대신 납부 |
무토(無土) 역둔토 | 민유지에서 국가에 납부한 세금을 해당 궁방 혹은 아문으로 송납 |
- 유토 역둔토 1종은 국유지, 2종과 무토 역둔토는 민유지였으나 일제는 유토 역둔토 2종을 1종과 함께 국유지로 편입시킴
(2) 신고주의를 통한 토지 침탈, 허위 신고
- 신고 기간은 몹시 짧고 절차가 까다로웠으며, 일제 통치에 대한 반감으로 신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 → 미신고 토지의 국유화
- 동, 리 단위에서 신고 업무를 맡은 지주 총대는 부윤·군수가 임명했으며,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변 → 허위 신고에 의한 영세농의 토지 침탈
- 마을의 공유지, 문중의 토지 등 소유 관계가 불명확한 토지의 국유화 혹은 허위 신고에 의한 개인의 토지 독점
- 침탈한 토지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게 불하하거나, 동척을 통하여 일본인 농업 이민자에게 불하
(3) 토지조사분쟁
- 분쟁이 발생하면 화해 유도 →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분쟁지심사위원회 회부 → 분쟁지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불복할 경우 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서 최종 결정
- 접수된 토지조사분쟁은 화해를 제외하고도 3만3천9백37건에 달하는 수치 →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농민들의 광범위한 저항 의미
- 특히 국유지를 둘러싼 소유권 분쟁이 많았던 것은 토지조사사업의 수탈적 성격을 드러냄 → 민유지(유토 역둔토 2종, 미신고 토지, 마을·문중 공유지 등)의 국유지 편입에 대한 농민의 저항이 잇따랐던 것
- 일제는 관의 압력을 통한 ‘화해의 강제’, 경찰력 동원, 분쟁지심사위원회의 전횡으로 탄압. 분쟁지 심사위원회의 결정은 조선총독부의 주장을 정당한 것으로 결정 3)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1) 배타적 사적소유권 확립
- 소작농의 경작권, 도지권 등 관습적 권리를 부정하고 오직 지주의 사적소유권만을 인정하여 소작농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듦
- 토지조사사업 이전까지 도지권은 일종의 재산권으로 인정받았으나, 토지조사사업은 이에 대한 일체의 보상 없이 일방적으로 소멸시킴
- 배타적 사유권의 확립으로 지주 계층에게 막대한 이익 발생 → 총독부와 한국인 지주의 구조적 유착 발생
(2) 농민의 개간권 소멸
- 조선 말까지 미간지를 개간할 경우 개간자의 소유로 인정해 주었으나 토지조사사업은 국유 미간지에서의 농민의 개간권을 부정
- 개간자는 개간지의 소유주가 아니라 국유지의 소작농으로 인정됨
(3) 조선총독부의 재정적 기반 구축
- 조선총독부는 방대한 면적의 국유지를 강제 창출함으로써 국내 최대 지주가 됨
-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지세 수입의 원천 확보
(4) 기생(寄生) 지주제도 엄호
- 해체되어가던 조선왕조 말기의 반(半) 봉건적 성격의 기생 지주제도를 엄호하고 재확립
- 소작농의 소작지 경쟁 격화, 수리비(水利費), 선대자본(先貸資本)의 이자가 소작료에 포함되는 등 소작료의 앙등을 가져옴
(5) 일본자본의 토지점유 심화
- 동양 척식 주식회사 등 일본 토지회사에 막대한 토지 불하
-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매개로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에게 토지 불하
- 일본인 대지주 출현의 발판 마련
3. 식민지 근대화론적 관점
1) 토지조사사업의 목적
(1) 근대적 토지소유권과 등기제도의 확립
- 광무양전 당시만 하더라도 토지소유자를 시주(時主)라고 하여 임시적인 주인으로 파악 → 사실상의 사적 토지소유권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국가를 본주(本主)로 파악하는 왕토사상(王土思想)이 잔존하고 있음
- 토지조사사업은 실제의 토지소유자를 확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근대적 형식으로 소유권을 증명하는 등기제도의 도입을 목적으로 함
(2) 지세제도의 정비
- 결부제는 생산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징세한다는 목적이 있었으나, 근거가 되는 양안(量案)이 만들어진지 오래 되어 실제 생산력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함 → 오히려 불공정한 과세의 원인이 됨
- 징세의 실무는 서리가 담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의적 지세부과, 중간 횡령이 이뤄짐
- 갑오개혁 이래 지세제도의 정비 시도가 있었으며, 토지조사사업은 이를 계승·발전하는 목적을 가짐
(3) 근대적 자본주의 제도의 이식
- 일제는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로 영구병합하기 위해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일본과 동일한 형태의 근대적 자본주의 제도를 이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음
- 토지조사사업도 근대적 자본주의 제도 이식의 측면에서 바라봐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음
2) 수탈론적 관점에 대한 비판
(1) 신고주의를 악용한 토지 침탈 사례
- 신고주의를 악용하여 토지를 침탈하는 토호(土豪), 모리배(謀利輩)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를 실증할 사례가 밝혀진 바 없으며 그 수는 극히 미미할 것으로 추정
- 문서 위조 등으로 토지를 침탈하려면 사적 소유권이 극히 미약하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 →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권은 조선 후기에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토지조사사업은 기존의 소유권을 재확인하는 절차였을 뿐
- 지주 총대는 이름과 달리 모두 지주 계층은 아니었으며, 조선총독부에 고용된 가난한 고용인 신분도 적지 않았음 → 남의 토지를 침탈할 만한 권력이 있었다고 보기 어려움
- 마을의 공유지, 문중의 토지 등은 공동 명의 신고가 가능했으므로 개인의 독점이 생길 여지는 생각보다 적었음
- 신고된 토지도 결수연명부와 일일이 대조를 거쳤기 때문에 허위 신고가 생길 가능성은 극히 적음
(2) 미신고 토지
- 99.5%에 육박하는 토지에 대한 신고가 끝났다는 것은, ‘광대한’ 미신고 토지가 국유화 됐다는 주장의 허구성 입증
- 조선총독부는 오히려 신고 기한이 지난 뒤에도 소유권 주장이 타당하다고 생각되면 신고를 접수했고, 미신고자를 찾아가 신고를 독려하기도 함
- 0.5%의 사례는 화전 등 세금을 납부한 적이 없거나, 추후 부과될 과중한 세금을 두려워하여 고의로 신고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음
(3) 역둔토 문제
- 근본 원인은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며, 갑오개혁 당시 호조에서도 유토 역둔토 1종과 2종의 구분을 명확히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음
- 모든 유토 역둔토를 국유지로 파악했으나 이의제기가 들어오면 사안별로 심사하여 환급 여부 결정
- 역둔토 관련 분쟁에서 조선총독부가 항상 유리했다고는 말할 수 없음
(4) 토지조사분쟁
- 국유지 분쟁의 경우 조선총독부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진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사안에 따라 총독부가 이기기도, 민간인이 이기기도 했음 → 경성 지역에서는 민간인의 소유권이 인정된 것이 40% 가량. 전국적 규모의 통계는 연구 과제
- 분쟁지심사위원회의 결정에 불복 신청하여 고등토지조사위원회로 넘어간 것은 전체 분쟁지 중 10%에 불과 → 국가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했다면 더 많은 불복 신청이 발생했을 것
(5) 경작권과 도지권
- 경작권은 조선 초기 전주-전객제에서 인정되던 권리였으나, 조선 후기 지주제 하에서도 존재했었는지는 의문. 존재했다 하더라도 물권으로 보기 어려워
- 도지권은 1920년대 후반까지도 존재했으며, 조선총독부는 여기에 대해 어떤 간섭이나 압력을 행사한 적이 없음 → 도지권이 소멸한 것은 지주들의 권리 매입에 의한 것
(6) 국유지 불하
- 일제는 1912년 역둔토의 불하 대상자를 국유지의 소작인과 동척에 한정 → 동척을 불하대상자로 선정한 것은 동척의 이민 사업 추진을 지원하기 위한 것
- 그러나 실제 불하가 이뤄진 것은 1920년부터이며, 이때는 동척이 불하대상에서 삭제됨 → 동척의 이민사업이 이 시기에는 이미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민용 토지 불하라는 명분이 상실됐기 때문
- 불하는 연고 소작인을 대상으로 했으며, 소작인이 인수할 의향이 없으면 경쟁 입찰 방식으로 불하
- 10년간 불하대금을 분할 납부하여 전액 완납하면 소유권 이전. 완납 전까지는 소작료 체감(遞減) 납부 → 1928년을 기준으로 1920년 당시 소작인의 70% 가량이 토지의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거나, 불하대금을 계속 납부하고 있었음
3) 토지조사사업의 의의
(1) 근대적 토지소유제도 확립
- 왕토사상의 소멸과 근대적 소유권을 토지에도 적용
- 토지소유권은 조선 후기부터 이미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토지조사사업은 이를 법인화하는 과정으로 조선시대의 내재적 발전의 연속선상에 있음
-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한국 농민들의 적극성을 주목해야 함
- 전국 토지의 정확한 면적 파악
(2) 근대적 지세제도 확립
- 과세지가제 확립 → 토지 생산력을 기준으로 지가를 산정하고, 그 지가에 따라 과세
- 결부제의 부정확성으로 인한 불공평한 과세 기준 시정, 토지 생산력이 과세 기준이 됨
- 지세는 처음에는 지가의 1.3%로 책정되고 나중에 1.7%로 상향되지만, 당초 계획의 3%나 일본의 2.5%보다는 훨씬 낮은 수준 → 3.1 운동 이후 한국 농민을 무마하려는 정치적 의도
(3) 근대적 자본주의 제도 확립
- 배타적 사적 소유권이 등기로 증명된다는 것은 상품화의 논리가 토지 소유 영역에까지 침투했다는 것을 의미 → 토지의 매매, 저당권 설정에 의한 토지의 자본전화가 이뤄짐
4. 식민지 근대화론적 관점에 대한 비판
- 신고주의는 일종의 행정 편의주의이며 그로 인한 농민의 피해는 정도는 작더라도 분명히 존재했을 것
- 분쟁지 심사위원회는 1일 평균 40건 내외의 분쟁을 처리 → 얼마만큼 엄정하고 공평한 결과가 나왔을지 의문
- 1918년의 지세령 개정 이후 지세율은 13% 증가 → 농민들의 부담이 무거워진 것은 사실
- 일본에 비해 낮은 지가, 지세에 대한 누진세 미적용은 대토지 소유에 유리 → 토지조사사업 이후 해방까지 소작농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한 원인(일본인 대지주 출현)
- 해방 이후 농지개혁이 당면 과제로 부각 → 토지조사사업으로 확립된 근대성은 식민지적 근대성이었으며, 일제의 전제적 통치로 모순을 유지시켰을 뿐
- 기존 수탈론적 연구의 실증성 부재를 지적한 것은 큰 의미가 있지만, 일제의 침략적 의도에 대한 언급은 소홀 → 본의와는 다르게 ‘친일’로 비난받는 원인
- 식민지 시대를 다룰 때는 근대성과 식민지성을 함께 고려해야 균형을 맞출 수 있음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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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토지조사사업의 수탈성 재검토」, 『역사비평』 24호, 역사비평사, 1993
작년에 발표용으로 작성했던 자료.
교과서 인용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기준이기 때문에 교육과정 개편과 함께 새로 개정된 『한국사』 교과서와는 내용이 다름.